애노희락은 정말 네 가지 감정일까?
이제마의 性과 情을 다시 읽다
사상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매우 익숙한 네 글자를 만나게 됩니다.
애(哀)·노(怒)·희(喜)·락(樂).
보통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애는 슬픔, 노는 분노, 희는 기쁨, 락은 즐거움.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제마는 정말 사람을 ‘슬퍼하는 사람, 화내는 사람, 기뻐하는 사람, 즐거워하는 사람’으로 나누려고 했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실제 사람에게 적용하는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태양인도 화를 냅니다. 소양인도 슬퍼합니다. 태음인도 기뻐합니다. 소음인도 즐거움을 느낍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애노희락을 경험합니다.
그렇다면 이제마가 말한 애노희락에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감정이라는 말보다 조금 더 넓은 의미가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동의수세보원》의 구조를 조금 더 자세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제마는 애노희락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다루지 않습니다.
애성(哀性)·노성(怒性)·희성(喜性)·락성(樂性)이라는 표현이 있는가 하면,
다시 애정(哀情)·노정(怒情)·희정(喜情)·락정(樂情)이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같은 애·노·희·락인데 왜 앞에는 성(性)이 붙고 뒤에는 정(情)이 붙을까요?
만약 애노희락이 단순한 네 가지 감정 이름이라면 굳이 성과 정을 나누어 설명할 이유가 줄어듭니다.
따라서 애노희락을 이해하려면 먼저 성과 정의 차이를 살펴봐야 합니다.
오늘날 性을 성격, 情을 감정이라고 번역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대응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제마가 살았던 시대의 性과 情에는 동아시아 철학의 오랜 인간관이 배경에 깔려 있습니다.
따라서
性 = personality
情 = emotion이라고 그대로 번역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상의학의 구조에서 더 중요한 것은 두 개념이 서로 다른 방향의 인간 활동을 설명한다는 점입니다.
《동의수세보원》 「성명론」의 유명한 구절을 살펴보면 그 차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제마는 인간의 귀·눈·코·입, 즉 이목비구(耳目鼻口)가 천시(天時), 세회(世會), 인륜(人倫), 지방(地方)을 살핀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폐·비·간·신은 사무(事務), 교우(交遇), 당여(黨與), 거처(居處)를 행하는 구조로 설명합니다.
표현은 상당히 어렵지만 여기에는 중요한 방향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을 살피고 받아들이는 방향이고, 다른 하나는 그 세상 속에서 실제로 행동하고 관계하는 방향입니다.
이 구조를 염두에 두면 性과 情 역시 단순히 성격과 감정으로만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부분은 매우 신중하게 접근해야 합니다.
사상의학의 성과 정을 현대 심리학의 한 개념으로 완전히 치환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살펴보면 하나의 흥미로운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性에서는 사람이 외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지향하는가라는 문제가 두드러지고,
情에서는 외부 세계와 부딪히면서 자기 안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욕구와 반응의 문제가 중요해집니다.
쉽게 표현하면, 性을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방향성, 情을 그 과정에서 자기에게 돌아오는 현실적인 반응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볼 여지가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性과 情의 모든 의미를 설명하는 정의가 아닙니다.
다만 애노희락을 단순한 네 감정으로 읽는 것보다 이제마의 전체 구조를 이해하는 데 훨씬 많은 질문을 열어줍니다.
임상적인 상황을 하나 생각해보겠습니다.
두 환자가 진료실에서 화를 냈다고 가정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약 시간이 늦어지자 화를 냅니다.
“예약을 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합니까?”
두 번째 사람 역시 화를 냅니다.
그런데 이유가 다릅니다.
자신보다 먼저 온 노인이 계속 기다리는 것을 보고 직원에게 말합니다.
“저분이 먼저 오셨는데 왜 계속 기다리게 합니까?”
겉으로 나타난 현상은 같습니다.
둘 다 분노입니다.
하지만 그 분노가 향하는 방향과 그것을 일으킨 이유는 다릅니다.
따라서 단순히 “화를 많이 내니까 노(怒)가 강하다.”라고 판단한다면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은 감정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일지도 모릅니다.
애(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이 같은 뉴스를 보면서 슬퍼합니다.
한 사람은 사건을 보는 순간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생각합니다.
“이 일이 계속되면 앞으로 더 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다른 사람은 피해자의 가족이 어떤 마음일지를 생각합니다.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까.”
둘 다 슬픔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은 다릅니다.
이런 차이를 생각하기 시작하면 애·노·희·락을 단순한 감정의 이름으로만 보는 것이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 조금씩 보입니다.
여기에서 융을 바로 가져오면 안 되는 이유
앞선 글에서 우리는 융의 네 심리기능을 살펴봤습니다.
직관, 감정, 감각, 사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마의 애노희락과 융의 네 기능을 하나씩 대응시키면 되는 것 아닐까?”
바로 여기에서 조심해야 합니다.
융의 직관·감각은 인식기능이고 사고·감정은 판단기능입니다.
반면 이제마의 애노희락은 사상의학의 성정과 장부론이라는 전혀 다른 체계 속에서 등장합니다.
따라서 네 개와 네 개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연결하면 숫자를 맞추는 비교가 되어버립니다.
먼저 이제마의 애노희락이 자신의 이론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다음에 융과 비교해야 합니다.
이제마의 성정론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것이 마음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애노희락의 움직임은 사상의학에서 장부의 생리적 편차와 연결됩니다.
즉 이제마는 인간의 정서와 행동을 신체와 완전히 독립된 현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우리가 지금까지 연재에서 살펴본 문제와 묘하게 만납니다.
우리는 처음에 불면증에서 출발했습니다.
왜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떤 사람은 장이 아프고, 어떤 사람은 심장이 두근거리며, 어떤 사람은 잠을 못 자는지를 물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장뇌축과 자율신경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내수용감각을 공부하면서 몸에서 올라오는 정보가 우리의 느낌과 연결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다마지오의 항상성 개념도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100여 년 전 이제마가 제시했던 질문과 만나고 있습니다.
몸과 마음을 정말 따로 떼어놓고 인간을 이해할 수 있을까?
여기에서도 경계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합니다.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신경과학과 이제마의 사상의학은 같은 이론이 아닙니다.
다마지오는 현대 신경과학의 방법으로 뇌와 몸, 항상성, 감정과 느낌의 관계를 연구했습니다.
이제마는 19세기 조선의 철학적·의학적 세계관 속에서 인간의 성정과 장부의 관계를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이제마의 애노희락을 현대의 자율신경이나 신경전달물질에 직접 대응시키는 것은 근거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질문을 비교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다마지오는 묻습니다.
몸의 상태는 어떻게 느낌의 토대가 되는가?
이제마의 이론에서는 다른 질문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성정이 왜 몸의 생리적 차이와 함께 설명되는가?
출발점은 다르지만 두 질문 모두 몸과 마음의 관계를 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性을 외부 세계를 받아들이는 입력,
情을 몸에서 나타나는 출력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간단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까지 단순화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봅니다.
사람은 컴퓨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사건을 받아들이는 순간 이미 과거의 경험과 가치판단이 개입합니다.
그리고 몸에서 반응이 일어나면 그 반응은 다시 뇌로 전달됩니다.
그래서 실제 인간의 과정은 외부 세계 →인식 →판단 →신체 반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외부 세계 → 인식과 판단 → 몸의 변화 → 몸의 감각 → 느낌 → 다시 인식과 판단이라는 순환에 가깝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앞서 공부했던 내수용감각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몸이 마음에 영향을 주고, 마음이 다시 몸에 영향을 줍니다.
이제 조금 더 어려운 질문을 던져보겠습니다.
사상체질을 단순히 ‘태양인은 이런 성격’ ‘소음인은 저런 체형’이라고 보는 대신, 사람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반응하고 다시 자신의 몸을 느끼는 과정에 비교적 지속적인 방향성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된 결론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상의학을 현대적으로 연구한다면 상당히 흥미로운 가설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김도순 한의사가 융의 심리유형과 사상체질을 심리학적으로 연결하려 했던 문제도 바로 이러한 인간의 지속적인 심리적 방향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면 오히려 새로운 의문이 생깁니다.
왜 같은 애노희락이 性과 情에서 반복되는 것일까요?
더 흥미로운 것은 사상의학에서 이 둘의 작용이 체질별 장부의 편차와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애성·노성·희성·락성과 애정·노정·희정·락정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요?
性에서 시작된 방향과 情에서 나타나는 반응은 같은 방향일까요? 아니면 서로 균형을 이루는 반대 방향일까요?
이 질문을 풀어야 비로소 사상체질에서 말하는 성정의 편급(偏急)이 왜 병리와 연결되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가 처음 이야기했던 불면증도 다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외부 사건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몸이 반복적으로 긴장하고, 그 몸의 신호를 다시 느끼며, 밤에도 각성이 내려가지 않는다면, 불면을 단순히 ‘잠이 안 오는 증상’으로만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사람에게 오랫동안 반복되어 온 몸과 마음의 반응 패턴 속에서 바라봐야 할까요?
처음에는 장뇌축에서 시작했던 이야기가 이제 여기까지 왔습니다.
장과 뇌의 대화에서 시작해, 내수용감각과 다마지오를 지나, 융의 심리기능을 거쳐, 이제마의 성정론까지 왔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이 연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으로 한 단계 더 들어가겠습니다.
「性과 情은 서로 어떻게 움직이는가? — 애성·노성·희성·락성과 애정·노정·희정·락정」
그 글에서는 네 체질을 하나씩 놓고, 어떤 性과 어떤 情이 짝을 이루는지, 왜 性과 情의 방향을 구별해야 하는지, 그리고 성정의 지나침이 이제마의 장부론에서는 어떻게 몸의 문제로 이어지는지를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그 작업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애노희락을 네 가지 감정이 아니라 네 가지 정보처리와 신체반응의 방향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이 연재의 가장 중요한 질문에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글은 《동의수세보원》의 성정론을 현대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한 글입니다. 性·情·애노희락을 내수용감각, 자율신경계 또는 융의 심리기능과 직접 동일시하는 것은 현재 의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인간관을 비교하여 새로운 연구 질문을 찾기 위한 탐구적 접근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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