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같은 애노희락이 性에도 있고 情에도 있을까?
이제마의 성정론을 다시 읽다
앞선 글에서 우리는 김도순이 사상체질과 융의 심리유형을 어떻게 연결해서 바라보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태양인과 외향직관, 소양인과 외향감정, 태음인과 내향감각, 소음인과 내향사고라는 연결입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해석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생깁니다.
융의 이론으로 사상체질을 설명하기 전에, 이제마가 원래 무엇을 말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결국 우리는 다시 《동의수세보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서 아주 어려운 두 글자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성(性)과 정(情)입니다.
性은 성격이고 情은 감정일까?
오늘날의 언어감각으로 보면 쉽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性)은 타고난 성격이나 성품이고, 정(情)은 기쁨이나 슬픔 같은 감정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해하고 《동의수세보원》의 성정론을 읽기 시작하면 금방 문제가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제마는 性에서도 애노희락을 이야기하고, 情에서도 똑같이 애노희락을 이야기하기 때문입니다.
애성(哀性)·노성(怒性)·희성(喜性)·락성(樂性)이 있고, 애정(哀情)·노정(怒情)·희정(喜情)·락정(樂情)이 있습니다.
만약 性은 단순한 성격이고 情은 단순한 감정이라면, 왜 똑같은 애·노·희·락이 양쪽에 모두 등장하는지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서부터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애노희락을 네 가지 감정으로만 보면 생기는 문제
애(哀)를 슬픔, 노(怒)를 분노, 희(喜)를 기쁨, 락(樂)을 즐거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사상의학의 성정 구조를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인과 애(哀)가 관련된다고 해서 태양인을 단순히 슬픔이 많은 사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요?
소양인과 노(怒)가 관련된다고 해서 소양인은 화를 잘 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태음인의 희(喜)를 잘 웃는 성격으로, 소음인의 락(樂)을 즐거움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설명한다면 사상의학의 체질론은 지나치게 단순해집니다.
따라서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이제마가 말한 애·노·희·락은 단순히 순간적으로 발생하는 네 종류의 감정만을 의미하는 것일까?
감정의 내용보다 ‘움직이는 방향’을 볼 수 있을까?
사람이 어떤 사건을 만났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건을 보고 듣고 받아들입니다. 그 과정에서 몸이 반응하고 어떤 느낌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판단하고 행동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다마지오와 융을 공부하면서 계속 살펴보았던 과정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이 과정이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외부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가능성에 빠르게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서 충분히 받아들이고 처리한 다음 움직입니다.
어떤 사람은 관계와 가치를 먼저 보고, 어떤 사람은 자신의 내부 논리와 판단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애노희락 역시 단순히 네 가지 감정의 이름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움직이고 반응하는 서로 다른 방향을 표현하는 개념은 아닐까?
아직 그렇게 단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가지고 바라보면 性과 情에 모두 애노희락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조금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性과 情은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마음일까?
性과 情을 서로 완전히 분리된 두 가지 심리현상으로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오히려 한 인간이 세상을 만나고 반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작용의 국면이나 방향으로 이해할 가능성을 검토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동의수세보원》의 구조가 중요해집니다.
이제마는 인간의 마음만 따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귀·눈·코·입이라는 감각과 인식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폐·비·간·신이라는 장부의 문제를 함께 다룹니다.
즉 사상의학에서 인간은 처음부터 몸과 마음이 완전히 분리된 존재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움직임과 몸의 작용이 하나의 체계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사상의학의 성정론을 단순한 성격심리학으로만 읽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서 다마지오가 다시 떠오른다
이 지점에서 앞서 살펴본 안토니오 다마지오를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다마지오는 인간의 마음을 뇌에만 가두어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외부의 사건을 만나면 몸의 상태가 변하고, 그 변화가 신경계를 통해 뇌에 전달되며, 몸의 상태는 느낌과 판단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리고 판단과 행동은 다시 몸과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즉 인간에게서는 몸과 마음이 끊임없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습니다.
물론 이것을 곧바로 이제마의 성정론과 같은 이론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고 사용하는 개념과 학문적 배경도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두 이론을 놓고 생각해 볼 만한 공통 질문은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몸과 완전히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서는 두 사람의 생각을 비교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같은 哀라도 性의 哀와 情의 哀가 같을까?
이제 핵심 질문에 도달했습니다.
애성의 哀와 애정의 哀는 같은 글자입니다.
하지만 같은 위치에 있지는 않습니다.
노성의 怒와 노정의 怒도 마찬가지이고, 희성과 희정, 락성과 락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같은 글자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작용이라고 보아야 할까요?
오히려 이렇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같은 애·노·희·락이라 하더라도 性의 구조에서 작용할 때와 情의 구조에서 작용할 때 그 방향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합니다.
사상의학에서 성정의 작용과 장부의 편차가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 놓여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움직임과 신체 기능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있다고 본다면 체질은 단순한 성격도 아니고 단순한 장부의 강약도 아닐 수 있습니다.
체질은 감정의 종류가 아니라 ‘반응의 방향’일까?
이렇게 바라보면 체질에 대한 질문도 달라집니다.
태양인은 슬픔이 많은 사람인가?
소양인은 화가 많은 사람인가?
태음인은 기쁨이 많은 사람인가?
소음인은 즐거움을 좋아하는 사람인가?
이런 질문보다 훨씬 중요한 질문이 생깁니다.
이 사람은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이는가? 그리고 그것을 받아들인 뒤 어떤 방향으로 반응하고 판단하는가?
그 반응은 몸에서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과정이 오랜 시간 반복되면 몸과 마음에는 어떤 일정한 경향이 만들어지는가?
이렇게 질문하면 체질은 단순한 성격유형을 넘어섭니다.
한 인간이 세상을 만나고, 느끼고, 판단하고, 행동하고, 다시 균형을 찾아가는 전체 과정의 일정한 방향성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이 나타납니다.
물론 이것은 아직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하나의 가설입니다.
여기에서 융과 다시 만난다
이제 김도순이 왜 융의 심리유형론에 관심을 가졌는지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융 역시 겉으로 나타난 행동만을 본 것이 아니라 그 행동 아래에 존재하는 심리적 방향과 기능을 보려고 했습니다.
외향과 내향은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설명하고, 감각과 직관은 인식 방식의 차이를, 사고와 감정은 판단 기능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제마의 성정론을 단순한 감정론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작용 방향으로 해석하려 할 때 융의 심리유형론은 흥미로운 비교의 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반드시 선을 그어야 합니다.
융이 이제마를 설명하는 정답은 아닙니다.
융의 개념을 그대로 《동의수세보원》에 집어넣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두 이론을 동일시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구조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더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 애노희락 자체를 충분히 살펴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애·노·희·락을 네 개의 독립된 감정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상의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한 단계 더 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애노(哀怒)와 희락(喜樂)의 차이입니다.
애와 노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희와 락은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가?
그리고 왜 이 네 작용이 태양인·소양인·태음인·소음인의 체질 구조와 연결되는가?
이 문제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사상체질을 단순히 네 종류의 사람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습니다.
체질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균형을 이루는 하나의 전체 구조로 바라볼 가능성이 생깁니다.
다음 이야기 — 애노와 희락은 무엇이 다른가?
다음 글에서는 바로 이 문제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애노와 희락은 무엇이 다른가? — 사상체질을 움직이는 두 방향」
여기서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할 것은 애노를 부정적인 감정, 희락을 긍정적인 감정이라고 단순하게 나누는 것입니다.
슬픔과 분노는 나쁜 감정이고 기쁨과 즐거움은 좋은 감정이라는 현대적인 감정 분류만으로는 이제마가 말한 성정 구조를 충분히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애노와 희락이 인간의 마음과 몸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작용을 표현한 것은 아닌지 살펴보겠습니다.
그다음에는 애성·노성·희성·락성과 애정·노정·희정·락정을 하나씩 비교해 보겠습니다.
여기까지 가면 우리가 처음 던졌던 질문도 조금 달라질 것입니다.
체질은 ‘무엇을 느끼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세상을 만나고 몸으로 반응하고 다시 균형을 찾아가는 ‘방향과 과정’의 차이는 아닐까?
아직 답을 내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그 가능성을 하나씩 검토해 가고 있습니다.
참고 및 함께 읽을 자료
이제마, 《동의수세보원》 「사단론」
Carl Gustav Jung, 《Psychological Types》
Antonio Damasio, 《Feeling & Knowing》, 《Descartes’ Error》
김도순, 사상체질과 융 심리유형에 관한 관련 저술
※ 다마지오·융의 이론과 사상의학을 연결한 부분은 세 이론이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상체질의 본질을 탐구하기 위한 비교적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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