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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동덕

융의 네 심리기능과 사상체질은 어떻게 연결될까?

읽는 시간 약 15분

김도순의 관점에서 읽어보기

사상체질을 공부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상한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의 차이는 과연 어디에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체형일까요? 얼굴 생김새일까요? 소화 기능의 차이일까요? 아니면 성격의 차이일까요?

사상체질을 대중적으로 설명할 때는 흔히 몇 가지 특징을 나열합니다.

“이런 성격이면 소양인입니다.” “이런 체형이면 태음인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을 진료하다 보면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말이 많은 소음인도 있을 수 있고 조용한 소양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체격이 큰 사람이라고 모두 태음인인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체질을 겉으로 드러난 행동이나 체형만으로 이해하려고 하면 금방 한계에 부딪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의사 김도순이 사상체질을 심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던 시도가 흥미로워집니다.

김도순의 체질 연구에서는 사람의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이 아니라 그 행동을 만들어내는 심리적 방향을 중요하게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비교 대상이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유형론입니다.

앞선 글에서 융의 네 가지 심리기능을 살펴보았습니다.

융은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판단하는 기본적인 심리기능을

감각(Sensation) 직관(Intuition) 사고(Thinking) 감정(Feeling)으로 구분했습니다.

그리고 감각과 직관은 주로 세상을 인식하는 기능, 사고와 감정은 주로 정보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능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사상체질과 융의 심리유형을 연결해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흥미로운 대응이 나타납니다.

태양인 — 외향적 직관형

소양인 — 외향적 감정형

태음인 — 내향적 감각형

소음인 — 내향적 사고형

처음 이 표를 보면 조금 의아할 수 있습니다.

왜 태양인은 직관이고, 왜 소양인은 감정이며, 왜 태음인은 감각이고, 왜 소음인은 사고일까요?

단순히 네 체질과 네 기능의 숫자가 같기 때문에 하나씩 짝을 맞춘 것이라면 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각 유형이 무엇을 중심으로 세상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가입니다.

먼저 태양인부터 생각해보겠습니다.

융의 외향적 직관(extraverted intuition)은 현재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에 오래 머물기보다 외부 세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려는 방향을 가집니다.

눈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보다 “이것이 앞으로 무엇이 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네 사람이 오래된 빈 건물 앞을 지나간다고 해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갑자기 멈추며 말합니다.

“이 건물을 개조해서 새로운 공간을 만들면 재미있겠는데?” 현재 건물의 낡은 상태보다 그 건물이 앞으로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먼저 봅니다.

또 어떤 일이 막히더라도 기존 방법을 계속 반복하기보다 “다른 길은 없을까?”하고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 합니다.

이것이 직관 기능의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상체질의 태양인을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면 흥미로운 부분이 나타납니다.

태양인의 심리적 특징을 단순히 ‘적극적이다.’ ‘지도력이 있다.’ ‘고집이 세다.’라고 표현하는 것보다,

외부 세계에 열려 있는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을 빠르게 포착하려는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태양인을 외향적 직관과 연결하는 이유를 이런 곳에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다음은 소양인입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바로잡아야 할 오해가 있습니다.

융이 말하는 감정(Feeling)은 기분이 잘 변하거나 눈물이 많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은 하나의 판단기능입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이 사람들과 나에게 어떤 가치를 가지는가?”를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특히 외향적 감정은 그 가치판단이 외부의 사람과 관계, 사회적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모임에 다섯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계속 말없이 앉아 있습니다.

누군가는 그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향적 감정 기능이 강한 사람은 그 사람의 표정을 살핍니다.

“혹시 불편한가?” 그리고 먼저 말을 겁니다. “오늘 조용하시네요. 무슨 일 있으세요?”

모임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면 화제를 바꾸기도 합니다.

이 사람에게 외부의 사람과 관계의 상태는 매우 중요한 정보입니다.

이를 소양인의 심리적 방향과 비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양인을 단순히 ‘급하다.’ ‘활발하다.’ ‘화를 잘 낸다.’라고 설명하기보다,

외부 사람과 상황의 가치 및 관계적 변화를 빠르게 읽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태음인입니다.

융의 감각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인식하는 기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내향적 태도가 결합하면 이야기가 조금 복잡해집니다.

내향적 감각은 외부 자극 자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자극이 주체 내부에서 어떻게 경험되는가와 깊게 연결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은 음식을 먹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이 음식을 먹으면 내 몸이 편하다.” “이곳에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된다.” “저 사람과 있으면 설명하기 어려운데 몸이 불편하다.”

이처럼 자신의 경험 속에 축적된 감각적 인상이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태음인을 내향적 감각과 연결해 바라보면 태음인을 단순히

‘느긋하다.’ ‘먹는 것을 좋아한다.’ ‘움직이기 싫어한다.’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히려 태음인은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축적한 현실적 감각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방향을 가진 사람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즉시 뛰어가기보다는, 자신이 실제로 경험한 것, 검증된 것, 몸과 생활 속에서 확인된 것을 중요한 정보로 삼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소음인입니다.

융의 사고 기능은 “이것은 논리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판단하는 기능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내향적 태도가 결합하면 외부에서 정해준 판단보다 주체 내부의 사고체계와 논리가 중요해집니다.

예를 들어 열 사람이 어떤 의견에 찬성하고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외부의 여론만 본다면 따라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향적 사고 기능이 강한 사람은 마음속에서 계속 따져봅니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왜 이런 결론이 나왔지?”

자신이 논리적으로 납득하지 못하면 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겉에서는 신중하거나 결정이 느려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부에서는 상당히 많은 사고가 진행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소음인을 바라보면 ‘소극적이다.’ ‘겁이 많다.’ ‘말이 적다.’라는 단순한 성격 묘사와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소음인의 핵심을 자기 내부의 논리와 판단체계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는 방향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조금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 네 사람이 전통시장에 갔다고 생각해보겠습니다.

태양인은 처음 보는 물건을 발견합니다.

“이걸 조금 바꾸면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도 있겠는데?”

현재의 물건보다 앞으로의 가능성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소양인은 상인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 집 분위기가 참 좋네요.” 함께 간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살핍니다. 사람과 관계가 자연스럽게 관심의 중심으로 들어옵니다.

태음인은 직접 물건을 만져봅니다.

“지난번에 여기서 산 것이 괜찮았어.” 자신이 경험하고 확인했던 구체적인 감각과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음인은 가격과 품질을 비교합니다.

“이 제품과 저 제품은 성분이 무엇이 다르지?” “가격 차이가 나는 이유가 뭘까?” 자신이 납득할 수 있도록 원리와 논리를 정리합니다.

네 사람 모두 시장을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보고 있는 세상은 조금씩 다릅니다.

여기에서 핵심적인 개념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어디를 중심으로 세상을 관찰하는가입니다.

우리가 흔히 체질을 판단할 때는 행동을 봅니다.

말이 빠른가? 활동적인가? 꼼꼼한가? 사교적인가?

하지만 행동만으로 체질을 판단하면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직업과 교육, 나이, 사회적 역할 때문에 사람은 얼마든지 자신의 자연스러운 성향과 다른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소음인이라도 영업사원으로 20년을 일하면 말을 매우 잘할 수 있습니다.

소양인이라도 연구실에서 오랫동안 일하면 매우 신중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중요한 질문은 “무엇을 했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했는가?”입니다.

이제 앞에서 공부했던 외향과 내향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이 관점에서 외향과 내향은 단순히 사람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차이가 아닙니다.

핵심은 객체와 주체의 관계입니다.

외향적인 방향에서는 외부의 대상과 상황이 판단에 상대적으로 큰 비중을 갖습니다.

내향적인 방향에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주체의 내부 과정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태양인과 소양인을 양인(陽人)의 외향적 방향, 태음인과 소음인을 음인(陰人)의 내향적 방향과 비교해보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리고 기능을 다시 결합하면 태양인 = 외향적 직관 외부 세계의 가능성을 향합니다.

소양인 = 외향적 감정 외부 사람과 관계의 가치를 향합니다.

태음인 = 내향적 감각 자신 안에서 축적되는 실제 경험과 감각을 중시합니다.

소음인 = 내향적 사고 자신 내부의 논리와 판단체계를 중시합니다.

이렇게 하나의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경계선을 그어야 합니다.

이 대응을 “태양인은 모두 아이디어가 많다.” “소양인은 모두 사교적이다.” “태음인은 모두 현실적이다.” “소음인은 모두 논리적이다.”라고 받아들이면 다시 처음의 성격분류로 돌아가게 됩니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감각·직관·사고·감정 기능이 존재합니다.

태양인도 사고합니다. 소양인도 감각합니다. 태음인도 직관을 사용합니다. 소음인도 다른 사람의 감정을 살핍니다.

차이는 특정 기능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어느 방향을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하느냐에 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심리적 구분보다 더 흥미로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사람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판단하는 방향에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가 오랫동안 반복될 때 몸의 반응에도 차이가 나타날 수 있을까요?

앞선 연재에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율신경계와 HPA축이 반응하고 심장, 장, 호흡, 근육과 수면이 달라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내수용감각을 통해 몸의 상태가 다시 뇌에 전달된다는 것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외부의 가능성을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과, 사람과 관계의 변화에 민감한 사람, 자신의 신체 경험과 현실적 감각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내부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검토하는 사람에게 스트레스가 들어왔을 때 몸의 반응도 정말 동일할까요?

이 질문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더욱 신중해야 합니다.

현대 신경과학이 ‘외향적 직관형은 특정 자율신경 반응을 보인다.’거나 ‘내향적 사고형은 특정 장부가 약하다.’는 식으로 사상체질의 생리적 차이를 입증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 단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가설을 만드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상체질을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나는 태양인일까, 태음인일까?”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새로운 상황에서 무엇을 가장 먼저 보는가?

가능성인가? 사람과 관계인가? 현재의 실제 경험인가? 논리와 원리인가?

그리고 결정해야 할 순간에는 무엇이 나를 움직이는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떤 생각이 반복되는가? 그때 내 몸에서는 어디가 가장 먼저 반응하는가?

이 질문들을 오랫동안 관찰하다 보면 단순한 성격검사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한 사람의 일관된 반응 방향이 조금씩 드러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바로 이 부분이 김도순의 심리학적 체질 연구가 우리에게 던지는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체질을 외모로 맞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평생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방향을 관찰해보는 것.

사상체질을 다시 공부할 이유가 여기에서 생깁니다.

여기까지 오면 한 가지 큰 의문이 남습니다.

왜 이제마는 이러한 인간의 차이를 단순히 사고·감정·감각·직관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애(哀)·노(怒)·희(喜)·락(樂)이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더 어려운 문제도 있습니다.

《동의수세보원》에서는 애노희락이 한 번만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성·노성·희성·락성이 있고, 다시 애정·노정·희정·락정이 등장합니다.

같은 애노희락인데 왜 하나는 성(性)이고 다른 하나는 정(情)일까요?

이 차이를 이해하지 않고 애노희락을 단순히 슬픔·분노·기쁨·즐거움이라는 네 가지 감정으로 번역해버리면 사상의학의 중요한 구조를 놓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문제가 융의 네 기능과 사상체질을 연결할 때 가장 어려우면서도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다음 글에서는 드디어 이제마의 원래 구조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애노희락은 정말 네 가지 감정일까? — 이제마의 性과 情을 다시 읽다」

왜 같은 애노희락이 성에도 있고 정에도 있는지, 성과 정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애노희락을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몸으로 반응하는 방향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그 지점에서 융의 심리학과 이제마의 사상의학이 정말 만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따져보겠습니다.

※ 이 글에서 제시한 융의 심리기능과 사상체질의 대응은 현대 심리학이나 신경과학에서 확립된 보편적 분류체계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김도순 한의사의 체질심리 연구와 이후 사상심학에서 전개된 비교 관점을 바탕으로 두 이론 사이의 구조적 관계를 탐색한 것입니다. 사상체질 진단 역시 이러한 심리적 특징 하나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mo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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