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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동덕

이제마는 왜 몸과 마음을 함께 보았을까?

읽는 시간 약 11분

사상체질의 성정(性情)을 다시 읽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오래 보다 보면 병명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차이를 만나게 됩니다.

비슷한 나이이고 비슷한 생활을 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둘 다 직장에서 큰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한 사람은 말합니다. “요즘 신경을 많이 썼더니 밥만 먹으면 체하고 속이 답답합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먹는 것은 괜찮은데 밤에 잠을 못 잡니다. 누우면 머리가 너무 맑아집니다.”

같은 스트레스인데 몸이 반응하는 모습은 다릅니다.

지난 글에서는 이러한 차이를 자율신경계, HPA축, 내수용감각, 과거 경험 등의 관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꽤 오래된 질문과 만나게 됩니다.

사람마다 반복해서 나타나는 몸과 마음의 반응 방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이 질문을 100여 년 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바라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상의학을 만든 이제마(李濟馬, 1837~1900)입니다.

사상체질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먼저 네 가지 체질을 떠올립니다.

태양인, 소양인, 태음인, 소음인.

그리고 흔히 이런 식으로 기억합니다.

태양인은 폐대간소(肺大肝小), 소양인은 비대신소(脾大腎小), 태음인은 간대폐소(肝大肺小), 소음인은 신대비소(腎大脾小).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는 ‘대(大)와 소(小)’를 현대 해부학적인 장기의 크기로 그대로 받아들이면 사상의학의 핵심을 놓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태음인의 간이 실제로 다른 사람보다 크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사상의학에서는 장부 사이의 기능적 강약과 사람 전체의 생리적 특성을 함께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이제마는 사람의 차이를 몸만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의 체질론에는 처음부터 인간의 성정(性情), 즉 마음과 행동의 문제가 깊숙이 들어가 있습니다.

사상의학을 설명하는 글을 보면 성정을 흔히 성격이나 감정이라고 쉽게 번역합니다.

하지만 그렇게만 이해하면 조금 부족합니다.

《동의수세보원》에는 애(哀)·노(怒)·희(喜)·락(樂)이라는 네 가지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슬픔, 분노, 기쁨, 즐거움이라고 번역하면 얼핏 우리가 흔히 말하는 네 가지 감정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제마는 이를 단순히 “화를 많이 내면 어떤 체질이다.” “잘 웃으면 어떤 체질이다.”처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같은 애·노·희·락이라도 성(性)과 정(情)이라는 서로 다른 층위에서 다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않고 애노희락을 현대적인 감정 네 종류로만 해석하면 이제마가 말하려던 인간관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한자를 그대로 보면 性은 ‘성품’, 情은 ‘감정’이라고 번역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조금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동의수세보원》의 구조 안에서 성과 정은 단순한 현대 심리학의 ‘성격과 감정’에 정확히 대응하는 개념이 아닙니다.

이제마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고 다른 사람과 관계하며 행동하는 문제를 신체의 생리적 균형과 분리해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성정을 이해할 때는 “이 사람은 어떤 성격인가?”라는 질문보다 “이 사람은 세상을 어떤 방향으로 받아들이고 어떻게 반응하는가?”라는 질문이 더 흥미로울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상체질은 단순한 신체분류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앞선 글에서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다마지오가 던진 중요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경험하는 느낌을 몸과 분리하여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심장박동이 달라지고, 호흡이 변하고, 장이 움직이며, 근육이 긴장하고, 호르몬과 대사 상태가 변합니다.

그리고 뇌는 이러한 몸의 상태를 지속적으로 받아들이고 처리합니다.

그 과정과 우리의 주관적인 느낌은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합니다.

이제마와 다마지오가 같은 이야기를 했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100여 년의 시간 차이가 있고 사용하는 언어도, 연구방법도, 인간을 설명하는 체계도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나 두 사람에게 비슷한 질문을 던져볼 수는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을 몸과 완전히 분리해서 설명할 수 있는가?

이 질문입니다.

다시 환자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환자가 대답합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별로 안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조금 더 들어보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이를 악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어깨가 늘 올라가 있습니다. 식사 후에는 속이 답답합니다. 환자는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는다’고 말하지만 몸에서는 여러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스트레스를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잠도 잘 자고 소화도 잘합니다. 대신 작은 심장박동이나 복부의 변화에도 매우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가 정상이고 누가 비정상인가가 아닙니다.

사람마다 외부 사건을 받아들이고 몸으로 표현하며, 다시 그 몸의 신호를 느끼는 방식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내수용감각과도 만나는 지점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상의학의 성정을 현대적으로 생각할 때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던져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애·노·희·락은 단순히 네 종류의 감정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뒤에는 더 넓은 의미의 인식과 반응의 방향성이 들어 있을까요?

예를 들어 두 사람이 모임에서 똑같이 말을 많이 한다고 해보겠습니다.

겉으로 보면 둘 다 외향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다른 사람은 사람들의 표정과 분위기를 살피면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기 위해 말을 많이 합니다.

겉으로 드러난 행동은 같습니다.

하지만 그 행동을 만들어낸 방향은 다릅니다.

사람을 이해할 때 행동의 양만 보는 것과 그 행동을 일으킨 내부의 방향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접근입니다.

사상체질을 공부할 때도 이런 구분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사상체질을 대중적으로 설명하다 보면 쉽게 성격 유형론이 됩니다.

“성격이 급하면 소양인.” “말이 적으면 소음인.” “고집이 세면 태음인.” 이렇게 구분하면 매우 간단합니다.

하지만 실제 사람에게 적용해 보면 금방 문제가 생깁니다.

조용한 소양인도 있을 수 있고 말을 많이 하는 소음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직업과 교육, 사회적 역할, 나이와 경험에 따라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체질을 연구하려면 행동보다 행동을 만들어내는 방향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에 먼저 주의를 기울이는가?

판단할 때 자기 내부의 기준과 외부의 상황 가운데 어디에 더 무게를 두는가?

사람과 관계할 때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위험이나 스트레스가 발생하면 어떤 방식으로 대응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몸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이 질문들은 단순한 성격검사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여기에서 매우 조심스럽지만 흥미로운 가설을 하나 세워볼 수 있습니다.

체질을 단순히 체형이나 성격의 묶음으로 보는 대신,

한 사람이 세상을 받아들이고 판단하고 행동하며, 그 과정에서 몸이 반응하는 비교적 지속적인 경향성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살펴보는 것입니다.

아직 이것을 과학적으로 확립된 사실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현대 신경과학의 개념을 사상의학에 그대로 대응시키는 것은 위험합니다.

하지만 연구 질문으로서는 가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지금까지 서로 떨어져 있던 여러 분야가 하나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자율신경계는 몸의 반응을 이야기합니다.

내수용감각 연구는 몸의 내부 상태가 어떻게 감지되는지를 묻습니다.

다마지오는 몸의 상태와 느낌, 항상성의 관계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이제마는 인간의 성정과 장부의 생리적 차이를 하나의 체계 안에서 설명하려 했습니다.

이들을 같은 이론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볼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몸으로 반응하는 방식에 지속적인 차이가 존재하는가?”

그런데 20세기 초 또 다른 학자는 사람들의 심리적 차이를 전혀 다른 언어로 설명하려 했습니다.

바로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입니다.

융은 사람을 단순히 활발한 사람과 조용한 사람으로 나누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한 외향과 내향의 핵심은 행동량보다 심리적 에너지와 관심이 어디를 향하는가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사고(Thinking), 감정(Feeling), 감각(Sensation), 직관(Intuition)이라는 네 가지 기능을 구분했습니다.

흥미로운 지점이 여기에서 나타납니다.

이제마에게는 애·노·희·락과 성정이라는 인간 차이의 언어가 있고,

융에게는 외향·내향과 사고·감정·감각·직관이라는 인간 차이의 언어가 있습니다.

두 체계는 전혀 다른 문화와 시대에서 만들어졌습니다.

따라서 네 가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서로 짝을 맞추는 것은 위험합니다.

오히려 먼저 물어야 합니다.

이제마의 애노희락은 정말 감정의 종류일까?

그리고 융의 사고·감정·감각·직관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생각·기분·감각·직감과 같은 의미일까?

두 질문을 충분히 검토한 뒤에야 비교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글에서는 체질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융의 심리학으로 가보려고 합니다.

「외향적인 사람은 정말 말이 많은 사람일까? — 융의 내향·외향을 다시 읽다」

그 글에서는 단순한 성격검사를 넘어 융이 말한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사고·감정·감각·직관이라는 네 기능을 하나씩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 작업이 끝난 뒤 다시 이제마에게 돌아오면 비로소 더 어려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제마가 바라본 인간의 네 가지 방향과 융이 바라본 인간의 네 가지 기능 사이에는 정말 비교할 만한 구조가 존재할까요?

답을 미리 정해 놓지는 않겠습니다.

하나씩 비교해보겠습니다.

그 과정에서 사상체질을 단순히 ‘나는 무슨 체질인가’를 맞히는 방법이 아니라 몸과 마음의 개인차를 이해하려는 하나의 오래된 인간학적 시도로 다시 바라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 이 글에서 다마지오의 신경과학, 융의 분석심리학과 이제마의 사상의학을 함께 언급한 것은 세 이론이 과학적으로 동일하거나 서로를 입증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서로 다른 시대와 학문에서 인간의 몸·마음·개인차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비교하기 위한 탐구적 관점입니다.

mom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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